Saturday, February 25, 2017

2016년 12월 30일 금요일 거울상을 찾는 사람들 옆에는 없는 정의

페이스북 알림에 있는 두 개의 재판을 보면서 그저 답답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시위를 한 용혜인 씨에게는 이 년이나 구형되고 승부조작과 불법도박을 벌인 유창식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선고... 물론 구형이 선고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영향력을 가지는 건 확실하다. <호모 저스티스>(김만권 저)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내용도 법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쉽게 말해서 무전유죄 유전무죄이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시마코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적어도 법률을 제정하는 데 있어 각 정권은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 법, 다시 말해 정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것인 듯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들을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한 자들로 취급하고 처벌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세요. 모든 나라에서 정권의 이익이 정의이고, 아주 명백하게 이 정권이 힘을 행사하기에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으로 귀결하는 겁니다."

내가 법에 대해 생각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래 사람들 사이에 규칙 같은 건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랐을 테니깐. 하지만 사람이 주기적으로 식량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지기 시작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발생했고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다시 말해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고 피지배층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체계적인 법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법이 피지배층을 위해서 존재한 적은 현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번도 없었다. 피지배층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배층이 더 많은 것을 보호할 수 있을 때인 것이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법의 지배층 보호는 다소 옅어진 면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옅어진 것일 뿐 자본이 법을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슷하다. 물론 정말 법대로 한다면 밀릴 수 있지만 그 법을 해석하는 검사 변호사 판사와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은 대부분 자본의 손아귀에 놓여있다. 그러면 피지배층은 계속해서 피지배층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의 콩고물이 떨어지길 바라거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정의가 사라졌다고 말을 하지만 사라진 적이 없다. 정의는 언제나 가진 자 곁에 있었다. 나타난 적도 없다. 민중이 바라는 정의는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어쩌다 그 정의가 나타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더 확고한 지배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울상일 뿐, 거울을 치우면 끝이다.


페이스북 알림 같은 건 살릴래야 살릴 수가 없다.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리지만 다들 하나같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매달려 있다. 하긴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정보보다 낫긴 하겠지만...

용혜인 씨는 벌금 300만 원 선고를 받았다. 징역보다야 낫지만 이만한 돈을 낼 여유도 부족하거니와 유죄인 것은 마찬가지다. 법은 결국 지배층의 논리만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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