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 2017

2017년 1월 8일 일요일 사형에 대해

<십이국기> 5권 '히쇼의 새'는 요코가 경국 왕에 오르는 동안 하급 관리들이 이래저래 고생하는 이야기였다. (한 이야기는 다른 나라였지만) 이 책을 청와대에 보내주면 박근혜의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최순실이 읽지 않았을 테니 아무 소용도 없었겠지. 어쨌든 이 책에 나온 이야기 중에선 다른 나라(유국) 이야기가 가장 인상깊었다. 사형이 사실상 폐지되었던 나라에서 연쇄살인범이 나오면서 사형을 부활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법관이 갈등하는 이야기였는데 한 쪽에선 사형으론 범죄 예방을 할 수 없다, 다른 쪽에선 이번 용의자는 죄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재범이었고 반성의 기미도 없기 때문에 사형 외엔 효과가 없고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민간에선 네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이 나오냐는 감정적인 언사가 쏟아져 나온다. 이 사이에 선 이야기의 주인공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지금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형을 없앤 유럽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미국에선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것도 집행도 쉽다.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가지만 흉악범이 흥미유도성 기사를 남발하는 언론을 타고 나올 때마다 "저런 새끼는 죽여야 한다!"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형에 반대하는 나도 이런 이야기가 휩쓸고 돌아다닐 때마다 고민을 하게 된다. 흉악범에게 또다시 기회를 준다고 해서 정말 그게 반성의 기회가 될지 재범의 기회가 될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용서를 한다면 주체가 되어야 할 피해자가 없는데 우리가 피해자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고... 하지만 이야기 후반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민중들이 쉽게 살인범을 죽이라 말하고 관리들이 이를 주저하는 것은 살인범을 죽이는 것이 관리들 쪽이기 때문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칼을 쥐여 줘보자. 아님 편하게 전기의자에 전기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스위치라도 좋다. 눈 앞에 흉악범이 묶여있다. 칼을 휘두르거나 스위치를 누를 수 있을까? 다소 극단적인 논리로 들리겠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시키자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형수의 목숨도 사형 집행인의 마음도 사람들에게서 타자화된다. 사형이 집행되든 집행이 되지 않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팝콘 씹으며 지켜보는 관객이 된다. 관객 중에 화면 속 등장인물과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면 너머의 일로 치부하고 끝낸다. 그렇게 쉽게 날리면 보는 사람 속도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보는 사람을 지켜주고 있던 방벽이 시원하게 날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 트위터에 썼던 글을 옮겨와봤다. 트위터에서도 별 반응이 없었는데 여기에 쓴다고 해서 뭔 반응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지만 내가 쓰고 싶으니 옮겼다.






<다음 침공은 어디?> 중에서.

대담의 답변자는 2011년 일어났던 노르웨이 총격 사건 사망자의 아버지이며 극히 평범한 시민이다. 이걸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해버리고 쳐다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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